증오는 대상을 찾지만 분노는 상황, 조건을 찾는다.
증오는 즉자적이고 대안이 없지만 분노는 성찰을 기반으로 대안을 찾는다.
증오는 소모되지만 분노는 새로운 희망의 원천이다.
증오는 적대적이지만 분노는 화합을 모색해야 한다.
단, 절제되지 않는 분노는 공격성을 띨 수가 있고 증오와의 경계를 허물 수 있다.
우리 역사에서 한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80년 5월 광주의 아픈 역사의 희상자, 광주시민들은 수십년간 빨갱이로 매도되어 전두환 군부와 기득권 세력, 그 추종자들에게 증오의 대상, 즉 피해자가 증오의 대상이 되었지만 우리 국민은 슬기롭게 해쳐나가 민주화를 이루어 낼 수 있었습니다.
철저하게 단죄를 했으면 그 후세에 최근의 내란이 반복되지 않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내란이 형식적으로 진압된 지금 기독교로 위장된 매국세력은 트럼프에 접근해 매국에 앞장서고, 보수로 위장한 체제를 부정하는 극우 인사가 야당의 대표가 되는 작금의 상황에 분노의 감정을 넘어 성찰과 대안을 찾아가야 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불루길이 있다고 낚시를 포기하지 않듯이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아래 좋은 글이 있어 일부를 발췌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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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와 분노는 다르다.
증오는 사이다 맛이다.
달고 짜릿하고 속 시원하다.
증오는 특정한 대상을 위험인자로 간주하고, 적대와 배제의 대상으로 삼는다.
증오의 종착점은 특정인이나 특정 집단을 없애버리거나 무릎 꿇리는 것이다.
선악이 분명하고 이견은 이단이 된다.
우리 편에 불리한 이야기를 꺼내는 자들은 배신자, 부역자로 응징을 받는다.
증오에 기반한 집단 공격은 즉각적이며 효과적이다.
정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십자군 전쟁이다.
오늘날 한국 정치는 증오의 각축장이다.
사이다 맛의 유튜버와 사이다 맛의 정치인이 손을 잡으면 천하무적이 된다.
분노는 쓰다. 분노는 특정 인물이 아니라 불의를 재생산하는 시스템을 대상으로 삼는다. 분노는 나 자신과 내가 속한 집단의 부조리를 관용하지 않는다. 잘못된 구조를 창의적으로 재구성하는 방법에 대해 아무도 정답을 모르기 때문에 서로 충돌하고 갈등하며 더듬더듬 새길을 모색한다. 레지스탕스 출신의 스테판 에셀은 2010년 ‘분노하라’를 통해, 극심한 빈부격차와 인권유린에 분노하고 저항하라고 호소했다. 그의 절규는 유럽 전역에 ‘분노 신드롬’을 불러일으켜 2011년 스페인의 ‘분노한 사람들’(인디그나도스) 운동의 기폭제가 되기도 했다. 그런 스테판 에셀이 말한다.
“나는 호소합니다. 우리의 정신을 완전히 개혁하자고. 폭력은 거부해야 합니다. 우선 효과가 없기 때문에 그래야 합니다. 폭력 행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증오만이 더욱 깊이 뿌리내리며 복수심이 더욱 불타오를 뿐입니다.”(‘분노하라’ 중에서)
증오는 구조악을 답습한다.
팬티 바람으로 조사를 거부하며 발버둥 치는 윤석열이나 ‘아무것도 아닌 사람’ 주제에 브이제로(V0) 행세를 한 김건희를 누구보다 신랄하게 조롱하고 증오하면서도, 권력에 기대 뭐라도 한자리 맡아볼까 싶어 기웃거리는 일부 엘리트들의 행태는 구차스럽다.
권력에 유착해 이권을 얻는 시스템이 완전히 근절될 때까지 ‘분노한 사람들’의 역할이 필수적이다.
나 역시 증오와 분노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다.
증오하는 이들의 폭력에 증오로 응수하고 싶은 충동에, 면도날 위를 기어가는 달팽이처럼 매 순간 위태롭다.
그럴 때마다 곱씹는다.
증오가 고주파라면 분노는 저주파라고. 극심하게 요동치고 반사하는 고주파의 직진성이 아니라, 넓게 퍼지고 멀리 침투하는 저주파의 에너지가 단층을 움직이고 건물을 붕괴시킨다고.
분노해야 할 것을 증오로 탕진하지 말고, 분노를 증오로 퉁치지 말자고.